#66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습니까?
우노 츠네히로,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2018)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취향은 제각각이고 사람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기도 해서 이 책을 주제로 삼는 게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우리 구독자님들의 취향이 궁금해졌다).
당시 내 또래의 대부분이 그랬겠지만, 티비에서 방영한 <마징가 Z>, 〈인조인간 캐산〉, 〈이겨라 승리호〉, 〈우주소년 짱가〉, 〈은하철도 999〉, 〈이상한 나라의 폴〉 등을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이것들이 모두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추측하건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한 내 선호, 심지어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향수 같은 것마저 느끼는 이유는 저 어릴 적 경험에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서브컬처'에 대한 막연한 관심과 동경이 이어져 왔을 것이나, 아쉽게도 '덕후'는 되지 못했다.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우노 츠네히로(지음), 주재명·김현아(옮김), 워크라이프, 2018
이 책은 일본 서브컬처 평론가인 우노 츠네히로가 교토세이카대학 대중문화학부에서 진행한 '서브컬처론' 강의(2016년 4~7월, 총 22강)를 재구성한 것인데, "전후 일본의, 후반 40년 정도의 서브컬처인 만화·애니메이션·게임 같은 '오타쿠'적인 것을 중점"(21)으로 다룬다.
우노 츠네히로가 서브컬처론을 논증하는 방식의 장점은, 단순히 유명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작품론을 나열하지 않고, 일본의 전후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적·사회적·경제적 맥락 위에 작품들을 올려놓고 분석한다는 것이다.
그가 서브컬처를 논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허구 세계 분석은 현실 세계 이해로 이어진다"(30). "허구,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한 번 경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고법"(48)이 있고, 스스로 "'오타쿠이기에 보이는 현대 일본 사회'라는 것을, 일종의 정신사로서 그려 보고 싶"(30)기 때문이다.
그는 이 '허구'에 두 가지 역할(336)이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것을 허구의 세계에서 실현하는 것'
'언젠가는 존재·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
당연하게도 허구의 두 번째 역할을 강조하며, 책(강의)의 결론을 이끌어 낸다.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허구, 그런 상상력이 앞으로의 서브컬처에 요구되지 않을까. 그것이 이 강의의 결론입니다. (339-340)
이 도입과 결론 사이에서 저자는 수많은 일본 서브컬처 작품들을 분석하는데, 그 내용 중 핵심어 하나만 뽑는다면 '12세 소년'이다. 이 말은 미국 군정 시기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 대해 한 말("12세 소년처럼 유연하고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는 단계")에 등장한다. 일본 언론은 다른 뉘앙스로 곡해해 대중에 전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공업력과 군사력을 키워서 열강에 동참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덜 자랐다. 그러니 무모한 침략전쟁을 국민이 지지했다. 그런 일본을 미국이 어른으로서 교육한다.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 이 '12세 소년'이라는 발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12세 소년'인 채라고 생각합니다.(56)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이었으며, 게다가 패전국이다. 그 이후 미국(어른, 아버지)의 지배를 받게 되고, 정상적인 군사력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이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고, 그 정신은 어른도 될 수 없다.1 일본 만화에 항상 지겹도록 등장하는 대사인 '나는 더 강해져야해!' 같은, '강함'에 대한 집착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유유백서》,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의 여러 히트작을 만들어 낸 〈주간 소년 점프〉 같은 만화 잡지에는 유명한 편집 방침이 있다고 한다. 바로 "우정, 노력, 승리"이다. 이것은 '토너먼트 배틀 형식'의 발명(68-69)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것이다.
주인공 앞에 강한 적이 나타나고,
노력을 해서 동료와 힘을 합해 이겨 내고,
이긴 후 그 적과의 우정이 싹트고,
좀 더 강한 적이 등장하고,
그에게 도전하며 이야기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어떤가? 이 형식에 해당하는 만화들이 줄줄이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가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감동한 만화들도 작가의 영감과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독자를 늘려야 하는 상업지의 필요, 역사적 맥락, 시대적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인 것이다.
사실 같은 저자의 책인 《모성의 디스토피아》가 이 주제에 관해 더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이 책은 가볍게 읽으려고 했는데, 정리한 카드가 꽤 많아졌다. 이 책은 내가 감동적으로 봤던 많은 애니메이션, 만화 들에 대한 환상을 싹 걷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의 역할인 것 같다.
이 책을 출간한 '워크라이프'는 서브컬처 전문 1인 출판사이다. 좋은 책을 꽤 많이 냈고 나도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대표의 건강 문제 때문에 폐업한 상태이다. 이 출판사의 절판된 책들이 높은 중고가로 거래되고 있는데, 한국에는 서브컬처에 관한 마땅한 책이 없는 것도 그 이유인 듯 하다.
저자의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문화'를 창출할 수 있"(21)다고 생각한다.
아베 신조 정권이 일본 헌법 9조 개정을 그렇게 밀어 붙였던 이유는, '정상 국가'보다는 '12세 소년'이 표면적으로 '어른'이 되기 위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