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진정한 공화주의자는 '훌륭한 혐오자'여야 한다"
윌리엄 해즐릿,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2025)
오래 읽게 되는 책은 보통 두꺼운 책들이겠지만, 계속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 역시 그렇다. 독서에 대한 많은 충고들에서는 그런 경우에 메모만 해두고 넘어가야 집중을 깨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시도는 해봤지만 그러기에는 그 충동이 너무 커서 이제는 저항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충동대로 저자가 인용한 책의 한국어판이 있는지 검색해보고, 내용과 별 연관 없이 떠오른 단상을 책 여백에 메모하고, 그 메모와 연관된 책이 떠올라 찾아보고, 심지어는 주문까지 한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중 〈미술가의 노년에 관하여〉 44페이지에서 "블레이크"를 발견하고는 그가 그린 《신곡》의 삽화와 함께 '화가와 시인'이라는 이미지가 스치고, 설명할 수 없는 꿈처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영옥과 영희 자매 그리고 그들의 화가 부모가 떠오르고, 곧이어 김구용 선생의 《구용 일기》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한국의 문학 작가를 연구해야 한다면 김구용 선생을 해야겠으며, 연구하지 않더라도 그의 전 작품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다른 에세이, 시들보다 우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의 전집 중 세 권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나머지 책들도 사야겠는데 지금은 전집으로만 판매하고 있어서 몇 년 째 보관함에만 넣어두고 있었던 전집을 (부담스러운 가격임에도) 주문했다.1
나를 이렇게 멀리 데려다 놓는 책이 좋다. 읽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되니 길은 잃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책은 시간이 걸린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윌리엄 해즐릿(지음), 공진호(옮김), 아티초크, 2025
이 책에는 해즐릿의 글 일곱 편 — 미술가의 노년에 관하여,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패션에 관하여, 성공의 조건에 관하여,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사형에 관하여 — 이 있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이어 해즐릿에 대한 이미지가 더 선명해졌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타협하지 않고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 사상가이자 문장가.
이 말은 다름 아닌 해즐릿 스스로에게 넌지시 충고하는 말처럼 들린다.
성공은 자격보다는 획득에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다. 자신의 자질 향상 기준을 너무 높이 잡거나 대중의 안목을 너무 높이 보는 것은 성공에 걸림돌이 된다. 무엇이든 완벽해야 한다고 마음을 정해놓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남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나도 못한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최선의 결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 〈성공의 조건에 대하여〉 중, 119
그러나 "우수함만 가지고 명성으로 가는 길은 가장 좁고 가파르며 길고 힘이 든다. (…) 결국 가장 견실해 보이는 명성은 기만의 일종일 뿐"(120-121)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하숙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이전 책에도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라는 편이 있었지만, 해즐릿이 자신의 글에서 문득문득 언급하는 죽음은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2에서 말하는 '그' 죽음과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열정 때문이다. (…) 즐거움이 종결되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이 종결되기 때문에 삶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 돈을 잃는 노름꾼일수록 더 필사적으로 노름에 매달리는 이치와 같다.
—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중, 84
"삶을 애착하는 마음은 우리가 삶을 얼마나 흥미로워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88)이고, 우리에게 "삶에 애착하는 마음의 세기가 행복의 그릇된 기준임을 보여주고자"(93) 하는데서, 해즐릿의 회의주의자적인 면모 또는 삶과 죽음의 진실을 희미하게 만드는 장막 같은 것은 그의 앞에서 소용이 없어지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본다.
우리는 눈에 너무 가까이 들이대지 않은 먼 것에 어렴풋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의 색을 입힌다.
—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중, 55
해즐릿의 글은 아름다우며,
진정한 공화주의자란 "가난한 사람의 오두막 너머로 떨어지는 샛별을 보고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희망과 연결시키는 사람" (163)
지금 여기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자는 '훌륭한 혐오자'3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미덕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장 호감이 덜 가는 미덕이며, 모든 일 중에 가장 힘들면서 생색이 안 나는 일이다. 자유에 대한 사랑은 독재자에 대한 혐오에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자는 자유를 혐오하는 자유의 적들을 전심전력으로 혐오한다. 그가 가진 수단이 얼마 안 될지라도 기억은 오래 가고 의지는 자유의 적들 못잖게 강하다. 자유의 적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위해를 절대로 잊거나 용서하지 않듯이, 진정한 공화주의자는 자유의 적들이 가한 위해를 절대로 잊거나 용서하지 않는다. 이 두 부류 사이에는 적의만 있을 뿐이다.
—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164-165
혹시 내가 ‘성인 ADHD’가 아닐까 의심해 본 적이 있지만 주요 증상들을 확인해보니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표적으로, 물건을 거의 잃어버리지 않고 몇 시간씩 집중할 때도 있다.
드디어 개정판이 출간됐다. 번역자는 그대로이고, 출판사는 바뀌었다.
"해즐릿이 좋아하는 표현인 '훌륭한 혐오자'는 대체로 멍청이와 파렴치한을 혐오하는 사람을 뜻한다." (164, 역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