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윌리엄 해즐릿(지음), 공진호(옮김), 아티초크, 2024
William Hazlitt, On the Pleasure of Hating (1823)
책에 있는 저자 소개는 달뜬 느낌이 있어1 위키피디아를 참고하면, 윌리엄 해즐릿(1778~1830)은 "영국의 에세이스트이자 희곡 및 문학 비평가, 화가, 사회 평론가, 철학자이다. 그는 오늘날 영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새뮤얼 존슨, 조지 오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간주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 비평가로도 인정받고 있다. 문학과 미술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현재 거의 읽히지 않으며 대부분 절판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 덕에 알게 되었고, 마침 작년에 한국어판이 출간되어 있었다. 알라딘에서 광고 배너를 본 것이 기억나는데, 아마도 도발적인 제목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산 책은 벌써 6쇄던데 대중들의 이런 뜨거운 반응은 역시 제목 때문 아닐까 예상해본다. 사람들은 작년과 올해에 걸쳐 자기 안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혐오를 지켜보며 그것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책은 해즐릿의 에세이 6편,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쓴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가 실려있다. 첫 번째 에세이가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혐오의 즐거움에 대하여〉이다. 해즐릿은 이 글에서 여러 종류의 혐오를 나열하지만 결국 그 혐오는 자신을 향하며 긴 씁쓸함을 남긴다. 나는 이 씁쓸함에서 벗어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우정에 속는 얼간이이자 사랑에 우롱당하는 바보인 내가 가장 의지하던 것에 낙담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충분히 혐오하고 경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60)
여섯 개의 에세이 중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이다. 이걸 읽고나면 MBTI 같은 성격 분류가 꽤나 원시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몇 “부류”만 인용해 보자면, 이런 식이다.
"친절한 불만덩어리 (...) 대개 의기소침하고 인생에 실망한 사람들"
"여름 친구 (...) 우리가 번창하면 우리의 환심을 사고 우리의 허영심을 치켜세운다 (...) 조금이라도 불운하거나 불쾌한 일이 다가오는 듯하면 말도 없이 떠난다."
"기분에 따라 매우 쾌활할 수 있지만 모든 말이나 행동이 편협하고, 겸손하되 천박한 기조가 흐르는 사람들 (...) 이 부류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상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남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줄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우리에 대해 들은 나쁜 말은 전부 다 전하고 좋은 말은 감추는 퉁명스럽고 '솔직한' 부류"
"이웃의 가십거리를 조달하고 면전에서는 발림말을 하고 돌아서면 뒷담화를 하는 수다쟁이들이나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
"논쟁을 벌여야만 설득시킬 수 있을 법한 사람"
"수없이 질문을 해대는 사람"
"암묵적 동의 (...) 우리의 모든 감정에 양보하고 우리의 생각대로만 생각"
해즐릿이 말하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고의로 불쾌감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호감을 살만한 거의 모든 자질이 있는데도 괜히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고, "이렇게 운이 없는 것은 우선 그들의 태도에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 부류를 읽을 때마다 '어, 난가?' 싶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조금씩 묻어 있는 나. 그리고 이 부류 중 어딘가에도 해즐릿이 숨어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해즐릿의 에세이마다 끝 부분에 결론적인 내용이 있다는 패턴을 힌트 삼아, "에세이의 끄트머리 외에는 적절한 자리가 없는 사람들의 특색", 비위에 거슬리는 부류는 무엇인지 보자.
불만이 있지만 재미있는 사람들이 이 부류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패에 도취해 있다가 행운이 자신들에게 기울면 절망에 빠진다. (...) 자신들에게 찾아온 행운에 기대거나 동조하지 않고 그것을 순간의 망상으로 간주한다. (...)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자신이 다시 타당한 근거에 기반한 사고를 한다고 느낀다. 이들의 상상력은 활기가 없어서인지 습관이 안 되어서인지 자기 비하의 낮은 지반에서 위로 떠오르지 못한다. (...) 이 비관론자들 부류는 남들의 불행에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불행에 기뻐한다. (...) 짜증에 찬 불평과 불편함에 대한 기대가 이 부류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양식이다. (126-127)
나는 해즐릿이 스스로를 이 부류로 분류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명상하듯,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탕으로 성찰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렇게 자신을 비춰주는 것 같은 책을 읽으며 함께 성찰할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지금껏 사람들의 비위를 얼마나 거슬리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두루 마음에 들려면 먼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약간 바보스러운 면과 자기도취의 윤활유와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한다. 침울한 분위기와 시무룩한 모습이나 수줍음은 금물이다. (...) 처방은 이러하지만 실천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125)
"그의 작품은 현재 거의 읽히지 않으며 대부분 절판 상태에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해즐릿의 다른 책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한국어 판도 올해 초 출간되었다. 이 책도 읽어볼 생각이다.
강렬한 생각에 마음을 사로잡히면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그게 없으면 삶이 즐겁지 않고 삶 그 자체는 무관심이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
—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중, 82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에 나온 에세이, 회고록 목록인데 참고하시길.
생소한 작가의 작품을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인정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두루 마음에 들려면 먼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약간 바보스러운 면과 자기도취의 윤활유와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 왜 이렇게 떠오르는 사람이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