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없는 (척하는) 한자
천난, 《한자의 유혹》 (2019)
나와 한자(漢字)가 얽힌 과거를 떠올려본다. 국내 최초로 순한글 표기를 내세운 〈한겨레〉 신문이 내가 고등학교 때 창간됐으니 그 이전 그리고 그 한참 후까지도 신문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디어가 국한문 혼용을 기본으로 삼았다. 한자를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었고,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매일 아침 칠판에 써놓은 한자 두 자를 격자로 된 한자 공책에 몇 번씩 따라 쓴 것이 최초의 한자 공부로 기억된다. 획순에 따라 한 글자를 그럴듯하게 완성했을 때 나름의 성취감이 있었다.
중학교는 '한문' 과목이 있었지만 한문만 가르치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냥 다른 과목 선생님이 대충 수업 시간만 채우고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서울 변두리의 변변치 않은 학교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도 3학년 중간 쯤에 한문학과를 졸업한 '정통' 한문 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한글에도 별 관심이 없는) 아이들의 관심을 갑자기 한문으로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애들의 무관심과 반(反)면학 분위기에 치이는 한문 선생님이 애처로워서 마지못해 국민학교 때 익힌 한자 지식으로 호응해 드렸는데 그 덕에 칭찬도 받곤 했다. 그 한문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고등학교 때는 한문보다는 그것을 포함한 고전문학 과목에 더 흥미를 느꼈다. 호연지기를 자극한 고전문학 선생님 탓이기도 한데, 그 결과로 국어국문학과를 지원하게 되고 면접 때 교수님들 앞에서 한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학교에 한문학 관련 과목은 없었지만 한문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함께 모여서 사서삼경, 《사자소학》 등의 강독을 하고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 시험을 봐서 입학을 했다.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한자, 한문과 뜨거웠던 관계는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한자의 유혹》, 천난(지음), 우디(옮김), 안그라픽스, 2019
한자는 고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등 세계 4대 문명지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계승된 유일한 문자 체계
이 책은 "디자인 부호 저장 장치로서 한자의 역사적 문맥을 정리"하고 "한자 디자인이라는 쟁점을 다루었다"(서문). 한자 또는 한문 연구라고 하면 대부분이 "자구(字句) 해석과 고증", "한자 서법 예술 감성과 평가"에 치중되어 있으나 저자 천난(陳楠)은 "한자의 디자인 표현 방법론과 한자 디자인 사상의 발전 과정"에 집중한다.
칭화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중국 고문자예술연구센터 상임부주임,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 부주임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천난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자의 변천사, 그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디자인적 사고라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이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책의 핵심을 일곱 가지 주제어로 간명하게 정리한 것이다(서문).
자원(字源): 한자의 기원. 한자 초기 형태의 디자인 법칙 탐색
자맥(字脉): 다양한 실마리를 통해 정리한 한자 발전 과정의 맥락 관계
자성(字聖): 고대부터 지금까지 한자 과학과 예술의 각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대표 인물과 그들의 대표 사상 또는 주요 작품 총칭
자법(字法): 한자의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종합하고 추려낸 수많은 실용적 방법, 창작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마음가짐 정리
자기(字器): 주로 필기 재료와 도구를 연구하는 분야
자진(字陣): 한자 배열 조판과 창의적으로 조합한 한자의 통칭
자회(字繪): 장식용 그림문자, 창의적인 기하학적 글자체 디자인, 더 나아가 한자의 예술적 표현 통칭
이 중 "자맥, 자법, 자회가 핵심"이며 이 셋이 "각 장의 표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갑골문, 금문,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 등의 글자체가 왜 만들어지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자맥'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역설적으로 고대 한자가 가지고 있던 어떤 신비감 같은 것을 걷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제가) 전각을 새길 때 선호하는 금문(金文)의 역사적 배경, 다른 글자체들과의 연관성을 알고나니 이후 전각을 설계할 때 시야를 좀 더 넓게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상형문자로서의 갑골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갑골문은 "글자 수가 4,000여 자에 불과하고 해독할 수 있는 글자는 1,500여 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에 갑골문을 사용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갑골문 서법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식이 공통적이다. 첫째, 글자 구성의 기본 규칙에 반하지 않으면서 예술성을 높일 수 있다면 부족한 글자의 경우 기본 규칙에 따라 적당히 편방을 조합하거나 금문, 주문과 전서에서 글자를 가져와 적절히 보충하면 된다. (285-286)
실제로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을 보면 '만약 이 글자의 갑골문이 있었다면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없는 글자들은 만들어 놓았다.
한자를 새기거나 사용할 때마다 지금 한국에서 한자는 어떤 의미인지 자주 고민한다. 이것은 어쩌면 대중성에 관한 고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언가 만든다는 것은 혼자만 즐기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책의 뒷부분에서 천난은 갑골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데, 그는 갑골문을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약 3,500자의 현대적인 폰트로 만들어 상용화하기도 했다.
갑골문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젊은 콘셉트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3,000여 년 전 상나라와 주나라 때의 문자라는 뜻이고 젊다는 것은 갑골문이 발견된 지 겨우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97)
어쩌면 한국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예술로서의 한자는 갑골문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