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말은 얼마나 위험하고 아름다운가
게르트 위딩, 《수사학의 재탄생》 (2010)
《수사학의 재탄생: 계몽주의에서 현대까지》, 게르트 위딩(지음), 안미현(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Gert Ueding, Moderne Rhetorik: von der Aufklärung bis zur Gegenwart (2000)
《수사학의 재탄생》의 원제는 "Moderne Rhetorik: von der Aufklärung bis zur Gegenwart", 즉 "현대 수사학: 계몽주의에서 현대까지"이다. 위딩의 또다른 저서 《고전 수사학》과 연결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독일의 수사학'이라는 맥락 위에서 계몽주의 이후부터 현대까지의 수사학을 다루고 있다. 위딩은 "학문 분야로서의 수사학의 몰락 현상은 (…) 유럽 각 민족의 문화에서 늦어도 1830년대 이후에 감지되었지만,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없었"고, "그 결과 독일은 196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이미 20세기 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그 사이 활발해진 국제적인 연구 동향에 처음으로 합류하게 되었다"(14)고 평가한다. 옮긴이는 이런 역사적 과정을 반영하여 "수사학의 재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의미상으로는 '독일 수사학의 재탄생'이 더 적확할 것이다.
독일이 "수사학에 대한 준비 상태가 부족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중요한 하나는 "독일에 여전히 남아 있는 나치 시대 수사학에 대한 악몽과 그것의 엄청난 지속력"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들의 "독일 관념주의에서 유래된 전통적 인문과학의 강력한 현실 순응주의"(134)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인 '나치 시대의 수사학'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수사학적 연설이 대중매체로 전환하는 현상은 히틀러"에서 "절정에 이른다"(105). 롤프 호흐후트는 "병적인 연설 중독"이었던 괴벨스로부터 "일종의 설교 스타일을 입증해 냈는데, 설교 스타일의 효과는 무엇보다 지도자에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맹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수백만의 대중들이 히틀러와 그의 이상에 빠져들었던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십자군 원정 시대에 독일을 뒤흔들었던 함성을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105-106)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 "자신의 수사학적 완성도가 심사숙고한 경험에서 얻어졌다"고 기록한다. 그는 수없이 연습했고, "연설 기술이란 훈련된 연설 경험에서 나오며, 이론이나 기술, 이론과 교훈은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107)는 걸 알 수 있는 사례다.
히틀러가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 가이슬러, 에리히 드라흐 등이 발전시켜 놓은 "독일 수사학"은 "청중을 지배하고 적대적인 견해를 제거하는 연설 목표로부터 연설 상황이 자아내는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열정을 연결시키는 것에서부터 연설을 통해 도취 상태의 공동체 체험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107) 있었다고 한다.
이 '독일 수사학'에서는 "동의라는 목표와 함께 협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갖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도록 각인시키는 것에 불과하다"(107).
히틀러는 정치 연설의 설득적인 성격을 청중을 압도하는 것과 동일시했다. (…) 전통적인 기독교 설교론과 종교가 없는 종교 연설처럼 보이는 히틀러 수사학 사이에 엄청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107-108)
히틀러의 연설의 "유일한 과제는 자신의 정치적 신앙 고백과 지배자의 우상화를 반복해서 대중과 매체 앞에서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데 있었고, 따라서 우선 대중의 감정적, 미학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미디어적인 사건을 보여 주는 데 있었던 것이다".(109)
히틀러의 이런 태도에 혹시 독일 낭만주의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을 해본다. 위딩은 초기 독일낭만주의자인 노발리스의 ""예술가적 일면성 = 단순히 예술가를 위한 예술 작품, 대중성 = 비예술가들도 고려한 예술 작품"과 같은 생각과 이론적 단상들의 바탕에는 연설의 원래 기법과 과제를 청중의 감정적인 자극에서 찾는 수사학적 감정 이론이 깔려있다"(82)고 본다.
역시 초기 독일낭만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적인 연설을 "열광적 수사학"이란 간결한 개념으로 표현했다. 격렬하고 마법을 거는 듯한, 일상생활을 초월하는 감정의 자극이 그것의 핵심을 이룬다. (…) 물론 이렇게 해서 연설의 효과는 (…) 합리적인 설득이라는 목표에서 분리되었다. (…) 감정의 자극, 열광주의, 감동, 심지어는 도취도 사람들로 하여금 습관적인 것의 좁은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고, 일상과 산문적인 삶을 내버려 두고, 평소에는 사회생활이 그에게 차단했던 자유를 얻게 한다".(83) 이 대목에서는 히틀러의 연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담 뮐러는 독일에서 연설이 몰락한 주된 원인을 "독일 문학의 문어적 특성과 자기만족, 청중의 부재, 서로 다르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의 결핍,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공화국 전통의 부재를 꼽았다".(84)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르고 있지만, 헌법은 1948년에 제정되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공화국으로서는 80년이 채 못 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수사학이 설 자리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 다른 의문. 연설에 뛰어났던 한국 정치인들을 잠깐 떠올려보면 진보주의 정치인,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등이다. 말과 연설이 자칭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편이었던 적이 있었나. 엉뚱한 상상도 함께 해본다. 자신들이 연설을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수사학을 모르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