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필멸은 생명이 겪는 고통일 뿐 아니라 우주가 겪는 고통이기도 하다"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2025, 개정판) 서문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에 관해서는 올해 어린이날에도 쓴 적이 있지만, 이 책은 여러 번 써보고 싶다고 피력하기도 했고 얼마 전 개정판이 출간돼서 이제 누구나 사 읽을 수 있으니 맘편히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조금만 과장해서, 나는 이 책 그리고 《악에서 벗어나기》까지 읽고나서 세상이 달라보였다. 진부하지만 적절해 보이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파란약 대신 빨간약을 먹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긍정적 효과 중 하나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철학, 사회학, 심리학, 죽음학 등) 이 책 주제의 일부분만을 뻔하게 반복하는 많은 책들을 독서 목록에서 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지음), 노승영(옮김), 복복서가, 2025
Ernest Becker, The Denial of Death (1973)
이번 개정판에는 2023년 영어판에 새로 실린,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이 쓴 서문이 추가되었다. 물리학자가 이 책에 서문을 썼다는 것이 의외였으나 읽고나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정갈한 문장과 함께 글쓴이의 영혼이 드러나는 다른 서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린은 대학 2학년생일 때 누나의 권유로 이 책을 읽게 되고, "우리가 개인과 사회로서 행하는 일들이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을 가라앉히려는 시도라는 베커의 주장을 접한 뒤 나 자신의 탐구열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고 "물리학과 수학은 나의 개인적 불멸 기획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린은 "철학자들이 물리주의 관점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고수"하는데, "물리주의는 실재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들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물리주의 관점은 한발 더 나아가 모든 것 사이에 풍성한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과 나와 바위 모두 전자, 양성자, 중성자로 이루어졌다. 다른 점은 입자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뿐이다. (…)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 주머니에 불과하다. (15)
이 입장은 곧 "입자들의 질서 정연한 구성 중에서 무한정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대답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질서는 궁극적으로 붕괴하여 무질서가 되며 아무리 튼튼하고 아무리 붕괴에 저항하더라도 모든 것은 결국 부서"지므로 '아니요'이다. "필멸은 생명이 겪는 고통일 뿐 아니라 우주가 겪는 고통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무엇도 영속하지 않음을 인식하면서 나는 발견되길 기다리는 거대한 목적, 거대한 설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왜 이런 문장을 쓰지 못할까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내게 달라져 보인 세상 역시 이런 모습이었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압도적으로 거대한1, 모든 의문과 고통을 단숨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은 사실 없다.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는 탐구는 우리의 특별한 입자 배열이 남다른 능력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찬미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 (17)
그러나 그린은 "어둠 위에는 초월적인 것이 떠 있다. 그러한 초월은 우리의 입자 배열이 위대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위대한 신비에 빛을 비추고 위대한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고 "아무리 우려스럽고 덧없고 헛되더라도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밝히며 서문을 끝낸다.
인간의 존재에 감사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 생명에게 한 일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럼 만약 우리가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것에 거의 성공한다면 인류는 도약할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갑자기 내 눈앞에 대왕고래처럼 거대한 생명체 또는 SF 영화에 등장하는 괴수가 나타나서 압도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