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2022) 중 〈저자의 죽음〉
롤랑 바르트
문학에 관한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특히 자주 마주친 사람 중 한 명이 롤랑 바르트이다. 왠지 이름도 멋지게 느껴져서 대학 초년생 때 읽어보려고 했으나, 분명히 한글이지만 의미는 알 수 없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그런 느낌은 이후 다른 책에서도 수없이 느끼게 되지만, 이해를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조차 딱히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해가능성 없음. 끝. 그래서 좋은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행운이다.
롤랑 바르트(1915-1980)는 프랑스의 철학자, 비평가, 문학이론가이다. 25호에서 다룬 《한권으로 읽는 문학이론》에서는 그를 소쉬르로부터 영향 받은, 그리고 크리스테바와 영향을 주고 받은 "구조주의자인 동시에 포스트구조주의자"1로 분류한다. "초기 저작은 후기 저작과 구별되며, 특히 후기 저작은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이 《텍스트의 즐거움》은 후기 저작에 해당되는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지음), 김희영(옮김), 동문선, 2022
Roland Barthes, Le plaisir du texte (1973, 1978)
‘저자’
우리는 어떤 문학작품을 얘기할 때 저자를 통해, 즉 누구의 것인지를 통해 그 작품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304) 그러나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저자의 자리를 치워버린다. 저자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작품과 선행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현대적인 필사자(scripteur)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308)
그가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가 '번역하고자'하는 내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만들어진 사전일 뿐 (…)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 (310)
‘텍스트’
이 "하나의 거대한 사전"(310)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이제 텍스트가 (…) 그 중 어느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다.(309)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비록 그것이 신비평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311)
이제 의미는 저자와 비평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텍스트라는 짜임을] 풀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311)
‘독자’
이제 비어버린 저자의 자리는 독자가 차지한다.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312)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 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 [독자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단호히 선언한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313)
위의 책. 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