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재앙을 제대로 이해하기
W. G. 제발트, 《공중전과 문학》 (2018)
며칠 전 읽은 《토성의 고리》의 저자 W. G. 제발트의 또 다른 책 《공중전과 문학》은 1997년 제발트가 취리히에서 강연한 내용과 (강연에 대한 반응, 이후 도착한 편지들을 다룬) 강연 후기 그리고 강연 내용과 연결되는 불행한 사례로서의 알프레트 안더쉬에 대한 비평으로 이루어저 있다.
《공중전과 문학》, W. G. 제발트(지음), 이경진(옮김), 문학동네, 2018
W. G. Sebald, Luftkrieg und Literatur (2003)
제발트의 질문은 "참혹한 사건들을 어떤 관점으로 되돌아봐야 하는지"(7)로부터 시작하여, 이차대전 이후 독일인들의 역사 의식,
이른바 과거 극복이라는 것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하는데도 나에게는 오늘날 독일인들이 유독 역사에 무지하고 전통이 결핍된 민족으로 보인다. (9)
그리고 독일 문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제3제국 시기에 독일에 남아있던 대다수 문인들에게 1945년 이후 자기 이미지를 재규정하는 일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 상황을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박한 일이었다. (…) 자신들이 보았던 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우리 기억 속에 짜넣어두는 데 한 세대의 독일 작가 전체가 그토록 무능했던 가장 주요한 원인은 후세에 남길 자기 이미지를 미화하는 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집착했기 때문이다. (9-10)
이 둘이 이 책의 주제이다.
이차대전 중에 일어난 수많은 "참혹한 사건들" 중 제발트가 화두로 삼는 것은 독일 도시들을 초토화 시킨 공중 폭격이었다. 이 폭격은 영국 공군에 의한 것만 보더라도 전투기가 "40만 번을 출격"했고 "1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공중전들로 인해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는 철두철미하게 붕괴"되고, "독일 민간인 60만 명"이 희생되고, "주택 350만 채가 파괴"되고, "종전 무렵에는 7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았"(13-14)다.
이 "지역폭격(area bombing) 전략은 1941년 영국이 처해있던 극한의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폭탄을 대량 투하하여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자는 속전속결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영국이 전쟁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은 이런 공격 방침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28-30)
이 공중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특히 함부르크 폭격의 기록들은 지옥도(地獄圖)를 현실로 옮겨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고모라 작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폭격은 1943년 7월 28일 새벽 1시에 시작됐다. "1만톤의 파쇄폭탄과 화염폭탄"을 쏟아부었고 화염폭풍이 2,000미터 상공까지 치솟았다.(42-43) 사람들은 "섭씨 1,000도 이상 올라간 열기 속에서 숯이 되고 재가 되어버려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유해를 빨래바구니 하나에 다 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46)
절정에 이른 화염폭풍은 (…) 인간들을 살아있는 횃불처럼 들고 전진했다. (44)
그 참상을 겪은 생존자들에 대한 기록 역시 마찬가지로 비참했다.
사람들이 뒤엉키던 와중에 판지로 만든 가방 하나가 승강장에 떨어져 "박살이 나 그 안에서 소지품이 튀어나왔다. 장난감, 손톱깎기 세트, 불에 그슬린 빨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에 타 미라처럼 쪼그라든 어린아이 시체가 나왔다. 반쯤 정신나간 여자가 그 시신을 며칠 전만 해도 온전했던 과거의 성유물로 챙겨왔던 것이다." (46)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기록 자체가 드물다는 사실"(47)이다. 제발트는 "이 말 없음, 이 닫아버리고 회피하는 상태가 바로 우리가 1942년에서 1947년에 이르는 그 오 년 동안 독일인이 대체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 왜 그토록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라고 지적하고, "이차대전의 막바지 몇 년 동안 일어난 독일 도시들의 파괴가 새로 형성된 국가에서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96)는 것이 바로 제발트의 주장이다.
제발트는 "왜 독일 작가들은 수백만 명이 경험한 독일 도시들의 파괴를 서술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서술을 하는데 왜 그렇게 무능했는가를 추적"(108)하며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자크, 페터 드 멘델스존의 작품들을 비판한다.
이 강연 이후 제발트는 각계각층의 독일인들로부터 비판은 물론이고 관련 자료, 회고, 심경 토로 등을 담은 수많은 편지를 받는다. 강연 후기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상세히 밝히며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그 파괴의 밤들에 대한 기억들이 존재했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 기억들이 일반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표현되는 형식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게 형상화된 기억들이 독일연방공화국을 형성하는 공적인 의식 속에서 국가 재건 이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112)
제발트가 신뢰할 수 있는 형식에 대한 힌트는 아마도 알렉산더 클루게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적 개연성에 맞서 만들어가야 하는 미래가 있다는 진지한 호소 (…) 늘 잠재되어 있고 언제라도 발동될 수 있는 역사의 오류로 설계된 불행의 사회체제에 대해 상세히 다루는 클루게의 작업은, 우리가 줄기차게 연출해내는 재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곧 행복의 사회체제를 만들기 위한 제1의 전제가 된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91)
그리고 제발트는 글을 마무리하며 자신의 '동포' 독일인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겠다.
대다수 독일인들은 바로 우리가, 우리가 한때 살았던 도시들의 초토화를 유발한 장본인이었음을 적어도 오늘날에는 알고 있기를 바란다. (…) 우리가 쾰른과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서 겪었던 화염의 밤들을 생각할 때면 다음의 사실도 떠올려야 한다. 1942년 8월, 독일 육군 제6군의 선봉이 일찌감치 볼가 강에 도착하여 그중 적지 않은 이가 전쟁이 끝나면 고요한 돈 강 기슭에 버찌나무 밭을 일구며 정착하는 단꿈을 꾸고 있었을 때, 훗날의 드레스덴처럼 당시 난민들의 물결로 넘쳐나던 스탈린그라드 시는 1,200대의 전투기로 폭격을 당하고 있었으며, 공중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볼가 강 건너편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들 사이에서는 그 공습으로 4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에 환희의 감정이 퍼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142-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