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015)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지음), 문학과지성사, 2015
이 책은 십 년 전인 2015년에 나왔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인터넷서점 알라딘 판매지수가 36,058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알라딘에서 진행한 '21세기 최고의 책'에서 8명이나 추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저자 김현경씨는 인류학자이다. 그래서 이 책이 인류학 관련 학술서이겠거니 생각하고 읽었지만 별로 정확한 예상은 아니었고, 학술서와 인문 에세이 중간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런 위치는, '100자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대중적 흡입력을 가진 '인생책'이지만, 학술적 치밀함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책이 되어버렸다. 저자가 그 점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판사가 책 주제 분류를 '사회학 일반', '인류학'과 더불어 '교양 인문학'도 추가한 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결과를 예상한 것 같다. 작가의 의도가 어느 쪽이든 만약 정직하고 성실한 연구와 논증이 뒷받침 되었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 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25)
이 책의 키워드는 제목과 같이 "사람, 장소, 환대"이다. 모두 7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26-27)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1~3장)
상호작용 질서에서의 형식적 평등과 구조 안에서의 실질적 불평등이 어떻게 현대 사회 특유의 긴장을 가져오는지(4~5장)
우리가 환대를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된다면, 우리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요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6~7장)
저자는 "절대적 환대 없이는 사회가 생겨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증명하려" 했다고 한다. 이 "절대적 환대"에 관해 설명하는 6장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부분까지 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학자의 이론과 개념 들을 거쳐야 한다. 이 모든 것을 3백 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책에서 다루고자 했던 저자의 의욕이 과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논증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평가들이 있는 것 같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빙 고프먼의 ‘상호작용 질서’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빙 고프먼은 2000년대 초반쯤 인터넷 문화 관련 책들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저서는 아직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지 않았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상호작용 의례》, 《자아 연출의 사회학》, 《수용소》 같은 주요 저서가 나와 있다.
김현경씨도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고프먼을 인용하고 있다. 그로부터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은 저자의 몫이겠지만, 아직 고프먼을 읽지 않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저자의 것인지 알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잘못이 아니라, 부지런히 읽지 않은 내 탓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다소 부족하다고 느꼈던 지적 충만감은 고프먼의 책으로부터 얻기로 했다. 또 다른 독서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 역시 좋은 책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 사람, 인간, 인격, 존엄, 모욕, 굴욕, 사회, 유용성, 신분주의, 스티그마, 구조, 상호작용 질서, 얼굴, 수행성, 사회적 성원권 등 — 많은 개념에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모욕'은 "현대 사회에서 (...) 여전히 중요한 공적 의제"이고 "모든 정체성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이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103-104)
우리는 이 '모욕'이 실제로 작동하는 현실을 여러 해 동안 지켜봤다. 다행히 가장 큰 모욕이 “일상화”되는 것은 간신히 막아냈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모욕들은 여전히 많고, 이 모욕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집단들도 여전하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존엄과 연관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만"(104)드는 것을 우선 해야 할 것 같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131)
어제 (사랑하는) 최욱이 진행한 MBC 라디오 개표방송에서 방송을 끝내며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선곡해 들려줬다. 앞으로 계속 더 많은 민주주의가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