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4일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이재명 대표가 무대 위에 올라 '싸움은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말을 했을 때 사실 조금 과장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저들이 쉽게 물러나지는 않겠지만, 탄핵소추안이 어렵게라도 통과된 마당에 박근혜 탄핵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빠르게 결론이 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헌법 위반과 증거들이 너무 명백했으니까. 그러나 너무 순진한 기대였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이렇게 국민들이 거대한 물리적 실체로 나서 보여줘야만 그 엄중함을 깨닫는 자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뜻밖의 소득도 있기는 한데, 저들도 안간힘을 다해 싸웠는지 생살과 생뿌리가 드러났다. 본인들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라 여기고 법전을 자신들의 치부책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른바 '엘리트'1들이 공동체에 어떻게 큰 해악을 미치는지 온 국민이 매일매일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 의아했던 것은 이 싸움을 진보 대 보수(또는 극우)의 구도로 보는 점이었다. 아무리봐도 이건 민주 대 반민주, 헌법 대 반헌법, 공화국 대 반공화국의 싸움인데 말이다.
계속 시간이 흘러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선고 기일을 지정하지 않으며 모두의 속이 타들어갈 때, 스스로 마음을 달래보기 위해 헌법재판관들의 의도를 가장 선하게 '상상'해보려고 했었다. '헌법 무시와 곡해,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 판결을 통해서 헌정 질서를 회복시키려 고심하고들 있는 것 아닐까?' 내 상상이 사실에 얼마나 가까웠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쁜 판결이었다.
2024헌나8 -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선고요지
오늘 〈매불쇼〉에서 유시민 작가가 헌법재판소의 선고요지가, 어려운 법률용어를 피하고 일반인의 언어로 쓰여진 아주 좋은 글이라고 짚은 것에도 동감한다.
우리집에서 헌법재판소 정문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시위 소리야 창문을 닫으면 거의 들리지 않으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볼일이 있어서 그 앞을 지날 때는 참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모습은 이재명 대표의 사진을 판때기에 붙이고는 줄을 매달아서 강아지 산책시키는 흉내를 내며 끌고 다니는 한 남자였다. 익살스러운 피에로가 풍선 대신 큰 칼을 손에 들고 미소 짓는 것 같은 광기에 공포감을 느꼈다.
이들의 표정은 너무 행복해보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충일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이 딛고 있는 지반은 물 속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밭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상식과 우리의 상식은 접점이 없어보였다.
대결 상황에서 상대방을 절멸시키려는, 그래서 절대적 순수함을 이루려는 욕구는 가장 위험하다. 민주 세력이 일차적으로 승리한 상황에서 반대쪽이나 그 근처에 있는 세력은 그런 공포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신념과 정체성과 이익이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공포. 과연 정치로 화해와 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그들에게도 "품위 있게 권력을 포기할 기회를 제공"해야할지도 모른다.
"대한국민" "대다수가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을 믿"었고, 그 믿음 덕분에 민주주의는 작동했다. 대한민국은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의 예측을 넘어섰다.2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2025)가 이 엘리트 문제에 관해 다루고 있어서 읽어보려고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개인들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국가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같은 끔찍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또 다시 파면당하는 대통령은 보고싶지 않네요..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