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리는 엘리트를 없애기는 원하지 않는다"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2025)
이 책이 던지는 중심 질문은 "사회 권력에 관한 것"이다.(14-15)
누가 지배하는가?
지배 엘리트들은 어떻게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는가?
기존 상태에 도전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이런 도전자들을 발생시키는 데서 엘리트 과잉생산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역사적으로 지배계급들이 이따금 갑자기 권력 장악력을 상실하고 타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의 궁핍화와 엘리트 과잉생산,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엘리트 내부의 충돌이 점차 우리의 시민적 응집성을 훼손하고 있다."(14) 이 책은 "비인격적인 사회적 힘이 사회들을 어떻게 붕괴의 벼랑 끝과 그 너머로 밀어붙이지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12)이다.
저자 피터 터친은 이론생물학자로서 연구를 시작했지만, 그의 학문적 성과는 주로 '역사동역학'이라는 역사에 관한 사회과학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역사동역학(cliodynamics)은 "복잡성 과학의 접근법을 과거, 현재의 인간 사회 연구에 적용"(8)하는 것으로, "수학모델을 사용해서 우리 사회, 즉 복잡한 사회 체계의 각기 다른 '구동 부품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추적"한다. 그리고 "여러 대안적 이론들을 데이터를 통한 경험적 시험으로 검증하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12)한다.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엘리트, 반엘리트, 정치적 해체의 경로》, 피터 터친(지음), 유강은(옮김), 생각의힘, 2025
Peter Turchin, End Times: Elites, Counter-Elites, and the Path of Political Disintegration (2023)
한국은 고급 학위를 가진 젊은 인재들을 소화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고학력 청년 남성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안정성의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인구 집단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정의 추동 요인들은 이미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 중)
불안정을 낳는 네 가지 구조적 추동 요인은 다음 네 가지이다.(50)
대중의 동원 잠재력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궁핍화
엘리트 내부 충돌로 귀결되는 엘리트 과잉생산
쇠약한 재정 건전성과 국가의 정당성 약화
지정학적 요인
이 중 가장 중요하고, "위기가 다가옴을 보여주는 믿을만한 예측 지표"는 "엘리트 내부의 경쟁과 갈등"이다. 이에 관해서는 책 전체에 걸쳐 강조하며 설명하고 있다. 터친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경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고학력 프레카리아트1(또는 역사동역학의 용어로는 좌절한 엘리트 지망자 계급)가 사회 안정에 가장 위험한 계급임을 알 수 있다. 고급 학위를 가진 젊은이의 과잉생산은 1848년 혁명에서부터 2011년 아랍의 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격변을 추동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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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위험한 직업은 법률 전문직으로 보인다. 로베스피에르, 레닌, 카스트로는 변호사였다. 링컨과 간디도 마찬가지다.미국에서는 법학 학위가 공직으로 진출하는 최선의 경로로 손꼽히기 때문에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로스쿨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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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쿨 졸업생 대다수가 프레카리아트 성원이라는 것은 이상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123-125)
몇달 전부터 '여론조사꽃'의 여론조사 보고서를 받아보고 있다. 그 보고서 결과에서 항상 의아하고 이해가 안 가는 집단은 '이십 대 남성'이다. 이십 대 여성과는 너무 다르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이십 대 남성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으나 그 근본적 이유에 관해서는 사회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터친이 지적한 '엘리트 과잉생산'이 그들을 반엘리트로 만들고 있는 것 아닌지 의심해봄으로써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지만, 역사동역학의 분석 대상은 전세계와 그 역사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터친이 틈날 때마다 강조하듯이 수학적 모델이다. "언어적 관념을 수학 모델로 변환할 필요가 있다"(76)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 역사, 과학이 결합된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논증을 내놓고 있다. 지난 3월에 이야기했던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있다. 사실 터친도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터친의 결론은 이것이다.
사회들이 더 나은 사회적 조정을 이루기 위한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진화는 멈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지배계급이 사회를 망가뜨린다면 다른 대안 — 성공담 — 을 찾는 게 좋다. 그리고 우리의 통치자들에게 우리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복잡한 인간 사회가 순조롭게 작동하려면 엘리트 — 통치자, 행정가, 사상의 지도자 — 가 필요하다. 우리는 엘리트를 없애기는 원하지 않는다. 비결은 엘리트들이 만인을 위해 행동하도록 제약하는 것이다. (296)
최근 느끼는 것은, 어떤 책, 이론, 담론, 이야기 또는 다른 무엇이든 역사의 맥락 위에 올려놓아야 설득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만들어 내놓은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류의 시간인 것 같다. 그 시간 속에 간신히 설 수 있는 한 켠이라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오래 기억되거나 잊혀지거나하는 문제가 아니라 의미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당면한 문제다. 그래서 고전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이 책을 통해 미국 근대 역사의 중요 흐름을 맛보기하면서 미국 시민들이 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서 러시아 국민들이 왜 푸틴을 지지하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14년간 3,700만 명이 사망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내전"(47)이었던 중국 청대의 '태평천국의 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미 전쟁'이 이전 전쟁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도 알게 되었다.
얻은 것이 꽤 많은 독서였다.
precariat.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 현대의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규 고용 노동자층. (네이버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