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자신의 편협하면서도 명확한 필요에 따라 글을 읽기"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2023)
비비언 고닉(1935~)은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비평가,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 회고록 작가이고, 이 책은 고닉이 "15년간 예술대학 석사 과정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부터"(183) 나온 것이다.
《상황과 이야기: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지음), 이영아(옮김), 마농지, 2023
Vivian Gornick, The Situation and the Story: The Art of Personal Narrative (2001)
우선 책 전체에 걸쳐 중요한 개념이며, 책 제목이기도 한 '상황'과 '이야기'를 살펴보자.
"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는데, '상황'은 "맥락이나 주변 환경, (가끔은) 플롯을 의미"하고, '이야기'는 "작가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 작가가 전하고픈 말"(18)로 고닉은 규정한다. 컨텍스트(context)와 텍스트(text)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에세이, 회고록으로 범위를 좁혔을 때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여야 하는 것은 서술자 — 혹은 페르소나 — 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11)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세이나 회고록을 쓸 때는 페르소나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12)는 것이다.
고백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그들의 페르소나 ... 즉 독자들은 유기적인 완전체로서의 서술자를 믿음직하게 여긴다. 우리와 여정을 함께 하고, 글을 완성시키고, 우리의 시야를 전보다 넓혀주리라 믿을 수 있는 서술자. (31)
고닉은 1970년대에 '개인 저널리즘'이라는, 즉 "자전적 에세이와 사회 비평이 결합된 형태"의 글을 저널리스트로서 쓰기 시작했다. "이런 유의 글쓰기에 도사린 위험"에 빠진 이들은 "고해, 심리치료로서의 글쓰기 혹은 노골적인 자기도취의 구렁텅이 빠지기를 거듭"(14)했으며, 고닉은 이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과제로 삼은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를 당면한 아이디어보다 아래에 두는 것 ... 논점을 명확히 하고, 분석을 전개하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데에만 나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15)
책 전체에 걸쳐 자신의 창작론을 펼치며 모델이 될만한 다양한 에세이, 회고록을 '논픽션 페르소나'에 초점을 맞춰 비평한다. 이 책의 부제는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인데, "자전적 이야기를 에세이에서 회고록으로 인도하는 것은 탐구의 깊이"라고 말하며, "깊숙한 자아 탐구"(102)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회고록'이란 장르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혹시 은퇴한 노인이 약간의 회한과 자부심과 후대에 대한 당부를 담아 자신의 일생을 연대기순으로 기록하는 자서전과 같은 것인가? 고닉은 회고록을 이렇게 규정한다.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107)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까지는 일반적인 자서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라는 점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페르소나', '자아 탐구'를 필요로 한다.
모범적인 회고록이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회고록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108)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 — 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 — 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44)
그리고 이에 부합하는 작품을 사례로 인용하며 설명할 때 이론과 실제가 맞물려 돌아가는 통쾌함 같은 것을 느꼈다. 언급한 작품들 중 한국어판으로 나온 것은 매우 적다는 것이 아쉽다.
맥락이 풍부하고,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며, 사건과 관점으로 가득 찬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충동은 ... 인간 안에 강하게 내재해 있다. 억누를 수 있을지언정 절대 없앨 수는 없다.(106)
이런 창작론에도 불구하고 고닉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극적 표현력, 구조를 이해하는 본능적 감각, 서술의 표면 아래 언어를 가라앉히는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글을 읽고 평가하는 법은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한 덩어리의 소재 속에 묻혀 있는 경험을 발견하고 그것이 글로 잘 빚어지고 있는지 어떤지 알아내는 방법, 서사의 줄기와 이를 진전시키는 지혜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방법, '누가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묻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183)
그리고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입장을 수정한다. "처음부터 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곧 작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일 때까지 계속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아마도 앞에서 말한 것은 '완벽한 글쓰기'를 염두에 둔 것 아니었을까?
우리를 잠시 당황스럽게 한 고닉의 최종 결론은 이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편협하면서도 명확한 필요에 따라 글을 읽음으로써 글 쓰는 법을, 그리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190)
다행이다. 이로써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와도 연결고리가 생겼다.
내가 내린 결론은, 에세이와 회고록을 포함하여 개인적 서사를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상황과 이야기》는 필독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읽기를 통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본 통찰은 계속 곱씹어보고 싶다. 고닉이 '다시 읽기'라는 주제로 쓴 《끝나지 않은 길》을 읽어보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