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접촉하는 것마다 흡수하고 소화하는 무시무시하며 무한히 유연한 어떤 실체"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2024)
저자 마크 피셔(1968~2017)는 《k-펑크》를 통해 알게 됐다. 2023년에 《k-펑크》가 출간됐을 때 나름 화제가 됐고 몇 편의 소개글을 봤다. 궁금증이 생겼고 좀 더 알고 싶어서 책을 사서 읽었지만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진 않다. 작년에 첫째 아이가 혹시 집에 이 책이 있느냐고 물었고, 속으로 의아해하며 빌려줬다. 아직 책상 위에 잘 모셔져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지음), 박진철(옮김), 리시올, 2024(2판)
Mark Fisher, Capitalist Realism: Is There No Alternative? (2008, 2022)
마크 피셔는 한 마디로는 소개하기 어려운 학자다. 책의 저자 소개를 참고해보자.
잉글랜드 레스터의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러프버러에서 자랐다. 헐 대학을 졸업한 후 버밍엄 대학과 워릭 대학에서 공부했다. 워릭 대학에서 세이디 플랜트와 닉 랜드가 주도한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회'에 참여했고 1999년에는 《평탄선 구축물들: 고딕 유물론과 사이버네틱 이론-허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k-펑크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활동을 시작해 당시 융성 중이던 블로그 공동체의 허브가 되었다. 2009년에 친구인 타리크 고더드와 제로 북스를 설립하고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를 발표했다. 이어 2014년에 제로 북스에서 《내 삶의 유령들: 우울증, 유령론, 잃어버린 미래에 관한 글들》을, 2016년 말에는 새로 설립한 리피터 북스에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출간했다. 그 외에 (공동) 편집서로 《마이클 잭슨의 저항할 수 있는 소멸》(2009)과 《포스트펑크 그때와 지금》(2016) 등이 있다.
2017년에 사망한 후 블로그 게시물과 매체 기고문, 인터뷰, 미발표 원고 등을 다수 모은 《k-펑크》(2018)와 마지막 강의를 엮은 《포스트자본주의 욕망》(2020)이 리피터 북스에서 나왔다.
피셔의 초기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회(CCRU)'를 떠난 이후에는 "동시대 신자유주의 문화에 대한 좀 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견지하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다양한 요소의 복잡한 일상적 상호 작용을 분석하는 특유의 이론적 감수성, 관습적인 아카데미의 규범을 거부하는 모종의 지적 분방함 등은 이후에도 지속"(198)되었다고 한다.
피셔의 저서 중 한국어판은 세 권이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2018, 2024)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2019, 2023)
《k-펑크 1》 (2023)
이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 차단된 세대 간 전승, 교육의 중심적 역할 및 교사와 학생 모두를 고통에 빠뜨리는 교육의 직업적 구조, 나아가 사회 전반의 시민적, 지적 생활 등 서로 연결된 주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알렉스 니븐, 〈서론〉, 25-26)
그렇다면 책 제목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38)이다.
레이건-부시 시대의 실제적인 도덕적 짜임새, 즉 더 이상 분노를 일으키지 못하고 흥미조차 끌지 못하는 타락의 과포화 상태 ... 그런데 바로 이런 무감각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위해 기능한다.(55)
그에 앞서 피셔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불임'이라는 은유를 동원하는데, 여기서 이 책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 등장한다.
〈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38)
그리고, 묻는다.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40)
'옮긴이의 글'을 보면 "이 책은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한 철학적 논의나 정치적 분석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를 요약해 주는 용어로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대신 이에 더해 더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지만, 이 책의 핵심은 "학자 본연의 태도로 의도된 책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인 팸플릿 혹은 위대한 정치 에세이의 전통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208-209)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은 피셔의 이론 저변에 깔려있는 주요 사상들에 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고전 철학자로는 니체가 유일하고, 현대 철학자, 사회학자 들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프레드릭 제임슨,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등 — 의 이론은 내 관심 밖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책을 읽기 시작할 생각은 별로 없는데, 예전에 사두었던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을 읽어볼까 싶다. 사상들을 도식으로 정리해놔서(그야말로 '도식화') 지금 내 필요에 적합할 것 같다.
2008년 영국에서 씌여진 자본주의 비판서가 2025년 한국에 무슨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위력은 그때와 지금, 거기와 여기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